• And Did It My Way - 데미안

    2011. 6. 24.

    by. 셰익스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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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는 내내 <데미안>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도록 만든다. 나 같은 단세포 인간으로서는 평소에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내용이다. 우리는 왜 사는 것일까? 더 나아가서, 왜 사는 것일까를 우리는 왜 고민하는 것일까? 누구나 살아가는 그 흔한 인생에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려는 이유는 무얼까? 이걸 대체 우리가 알아내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일까? 누구의 이야기처럼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맞나? 머리가 복잡하고 귀찮고 어지러운 이야기일 뿐이다.

    몇 일전 산책을 하다가 개와 함께 열심히 걷고 있는 노인을 보았다. 그 개는 그렇게 노인을 즐겁게 해주다가 죽겠거니 생각하니까 개의 삶은 참으로 고민 없이 말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살 걱정도 없이 그저 태어난 데로 살다 죽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사람이나 개나 모두 하느님이 만든 피조물인데 왜 우리는 유달리 자아를 고민하고 먹고살 것을 걱정해야 하는가. 기업체에 종사하든 공무원이든 종속되어 살아가는 우리 삶이 혹시 개와 같지는 않은가.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사는 것은 노인을 산책시키는 개의 역할이면 충분하다. 개의 경우 주인을 떠나서 해 낼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 그렇다면 동물의 경우에는 자아실현이란 불가능 한 것인가? 잘 모르겠다. 인간의 경우 좀 더 일찍 깨달음을 가지고 자신의 소명을 찾는다면 그것이 자아실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개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인생의 목표라는 것을 설정하여 그것을 향해 달려 나가면 지금의 모습을 확연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면 다른 피조물과는 확실히 구별된다. 성공한 사업가의 경우는 힘들게 창업하셔서 지금은 자아실현을 몸소 체험하고 계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게 당신의 자아인지 하느님이 주신 소명인지 인간으로서의 목표였는지 누가 알겠는가. 만약 알았었다고 대답을 한다면 만들어낸 답변에 불과할 것이다. 어찌어찌 살다보니 이렇게 잘 됐다라고 말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하루하루 앞이 안보이는 선택과 도전의 순간을 보냈을 것은 너무도 뻔하다. 사기와 협잡도 많이 당했을 것이고 남모르게 눈물도 많이 흘렸으리라는 사실은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결국에는 누가 가르쳐 준 길의 결과를 알고 그 길을 평탄하게 갈만큼의 소명이나 지시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이런 제목으로 글을 쓰지 않았는가. 'All's Well That Ends Well (끝이 좋으면 다 좋다)'

    헤세는 그의 다른 책 <싯다르타>에서도 역시 수동적인 인생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자아실현의 중요성을 조명하고 있다. 똑같은 사람이 누구는 세상을 지배하고 누구는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목적만 정확하게 세운다면 인간의 능력은 자아실현을 뛰어넘어 세계역사를 뒤흔들 수도 있다. 결국에는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 될 것이라는 공자님 말씀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데미안에는 실로 오랜만에 내 사춘기를 일깨우는 단어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그땐 왜 그렇게 고민이 많았던가...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p7

    "우리가 배우는 대부분의 것들은 분명 완전히 진실이고 올바른 것이지만, 그것들 모두를 선생님들이 보시는 것과는 다르게 볼 수 있어. 그러면 대체로 훨씬 나은 뜻을 갖게 되지." - p39

    위에 소개한 글에서도 일부 보이지만 헤세의 작품을 통해서 가장 크게 내게 들린 메시지는 '인생에는 주어진 정답은 없다. 내가 만들고 내가 책임지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모두 똑같다. 주어진 동일한 인생을 더 알차게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고등학교시절 읽었을 때 데미안이 내 친구 정빈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에서도 그랬고, 영화 <친구>에서도 그랬지만 대게 학창시절을 그리는 성장소설 또는 영화를 보면 데미안 같은 친구가 꼭 등장한다는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얼마 전에 본 영화 <써니>의 주인공 하춘화도 이를테면 데미안 같은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인간사회의 틀은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다만 그 역할을 맡은 배우들만 바뀔 뿐이다.

    한 평생을 자아성찰에 관심을 두고 작품 활동을 했던 헤르만 헤세가 생각했던 인생에도 그를 위한 답은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를 위한 답은 없었으리라. 그마저 그가 죽기 전 그의 인생을 정리할 때 깨달은 것이지 미리 알았었을 리는 없다. 알아갈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 내 것과 남의 것은 결코 같지 않기에 어려운 것이 바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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