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르만 헤세 -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2011. 6. 27.

    by. 셰익스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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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에 조롱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정말이지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시간 때우기나 혹은 기분전환을 원하건 교양을 중시하건 간에 책에는 활력과 정신적 고양을 주는 뭔가 숨겨진 힘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활력과 교양을 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거나 측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마치 어떤 미련한 환자가 약국에는 좋은 약이 많다면서 칸칸마다 뒤져 온갖 약들을 돌아가며 다 먹어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요행히 자기한테 딱 맞는 약이 걸려, 약물중독이나 남용에 이르는 대신 활력과 원기를 얻을 때가 있는 것처럼 책을 고르는 경우에도 간혹 그러한 현상이 발생되기도 한다. 이번 달에 읽고 있는 <데미안>의 헤르만 헤세가 나에겐 딱 그러하였다. 내친 김에 <싯다르타>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까지 읽게 되었다.

    <싯다르타>는 국제도서전에서 독서신문 취재로 인터뷰한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가장 자신 있게 추천하는 책으로 그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이번 달 헤세에 대해 토론하는 김에 겸사겸사 손에 잡았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싯다르타를 읽고 나서 한층 더 궁금해진 헤세를 알기 위해 또 다른 작품을 찾던 중에 박범석 평생교육원장이 엄청난 충격을 받으면서 읽었다는 말에 솔깃하여 함께 보게 되었다. <데미안>이 전부인줄 알았던 내게, 헤르만 헤세의 다양한 작품을 접한 이번의 기회는 많이 힘이 들긴 했지만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헤세의 작품을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면서 기쁨이나 위로 혹은 마음의 평안이나 힘을 얻었다는 느낌이 드는 반면, 그 감동 자체는 명확하게 잡히지 않아서 그것을 기록해두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하게 하게 된다. 혹시나 이처럼 소중한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거니고 마는 것처럼 지나쳐버린다면 참으로 안타까우리라.

    박원순 상임이사는 인터뷰에서 <싯다르타>를 읽고 도가 트인 느낌을 얻었다고 했다. 직접 책의 대목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가 그런 느낌을 받았던 부분은 아마도 내가 깊은 통찰을 얻었던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여기 한 개의 돌멩이가 있네. 이 돌멩이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아마도 흙이 될 것이며, 그 흙에서는 식물, 아니면 짐승이나 사람이 생겨나게 될 거야.예전 같았으면 이럴 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겠지.
    <이 돌멩이는 단지 한 개의 돌멩이일 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며, 그것은 마야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순환적인 변화를 거치는 가운데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정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나는 그것에도 가치를 부여해 주는 바이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거야.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
    <이 돌멩이는 돌멩이다. 그것은 또한 짐승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신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부처이기도 하다. 내가 그것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그것이 장차 언젠가는 이런 것 또는 저런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항상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헤세의 책을 보면 단일성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위의 돌멩이의 비유가 의미하는 것도 그 단일성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것을 진리는 어떤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에 있다는 것으로 파악했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돌멩이는 흙이 되고, 흙은 풀과 나무가 되고, 이는 또한 동물이 되고, 다시금 흙이 되는 끊임없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진리는 돌멩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변화에 있다는 것, 사람이라고 하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人間)이라고 하는 ‘관계’에 그 집중점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하나로 파악될 수도 없다. 어느 한 사람도 하나의 특징만 가지고 있지 않으며, 모든 사물 역시 무수히 많은 측면들을 가지고 있다. 이는 말하자면, 모순되는 특징들 역시 포함하여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말로 하면 그 본질을 나타낼 수 없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전체로 파악하지 못하고 한 부분만을 떼어내어 ‘이 사람은 이래’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많이 일어나는 일이지만. 모든 것은 ‘변화’로, ‘관계’로, ‘전체’로 파악해야만 진리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런 논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하찮은 미물에게도 소홀하거나 가볍게 대할 수 없도록 사람을 경건하게 만든다.

    헤세의 작품 중에서 <데미안>못지않게 많이 읽힌다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은 일본번역서의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이 그대로 통용되었다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소박하게 나누면 나르치스는 지성형의 인간을, 골드문트는 감성형의 인간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나르치스는 수도사의 길을 택하여 오직 학문의 세계에 정진하는 것이 신의 섭리에 충실한 자신의 소명이라 여긴다(그렇다면 소명은 주어지는게 아니라 스스로 깨닫고 알아가고 받아들이는 것일까). 그렇다고 그가 신적 섭리를 그 자체로 신봉하거나 개체의 자유를 부정하는 운명론자인 것은 아니다. 그의 지적 직관은 신적 섭리와 한 개인의 운명 사이에 가로놓인 그 어떤 연관성까지도 통찰하며,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따름이다. 그렇게 보면 나르치스가 지성형의 인간이라고 해서 편협한 합리주의자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는 타인의 고유한 성격과 삶을 존중하는 관용의 미덕을 보여준다. 나르치스가 자기와는 전혀 상반된 성격의 소유자인 골드문트를 이해할 뿐 아니라 평생에 걸친 그의 방황을 끝까지 사랑과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에 대한 우정에서도, 여성들에 대한 사랑에서도 마음의 안식처를 찾지 못한다. 나르치스로 상징되는 질서와 규범, 그리고 어머니와 여성들로 상징되는 일탈사이에서 골드문트의 영혼은 분열되어 있으며, 그의 방황에는 그처럼 분열된 영혼과 삶의 비극성이 짙게 드리워 있다.

    모든 현실의 체험과 대비되는 <진정한 상상의 체험>을 골드문트는 예술의 세계에서 발견한다. 골드문트에게 예술은 자신의 가장 내밀한 체험이 육화된 세계인 동시에 현실 경험에서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가 아끼는 사도 요한 상象은 현실의 나르치스이면서 그 이상의 어떤 존재이며, 그의 예술 창작의을결정체인 성모 마리아 상 역시 그가 만난 모든 여성들인 동시에 영원한 여성의 형상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골드문트에게 상실의 고통으로 남아 있던 우정과 사랑의 체험은 완성된 예술 작품을 통해 다시 의미 있는 것으로 되살아난다. 순간 순간 덧없이 지나간 삶의 편린들이 의미를 되찾는 그 <진정한 상상의 체험> 속에서 현실과 이상, 순간과 영원, 삶과 죽음의 경계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나긴 방황의 여정 끝에 거울 앞에 선 골드문트는 늙고 초췌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상처로 얼룩진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

    헤세가 수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이 소설일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골드문트는 이 비극을 독자들에게 외친다. 골드문트의 고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성 모두의 고통이다. 책을 읽는 내내 명확하게 잡히지 않던 감동의 원인과 작가의 의도가 답답했는데, 다행히 책 380페이지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부분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지나온 인생과 방랑 생활, 이세상으로 외출나온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나온 시절을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그에겐 거의 아무런 결실도 남아있지 않았다. 한때 작업실에서 만들었던 몇 점의 인물상, 그러니까 사도 요한 상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고, 그러고는 이 추억의 그림책이 전부였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이 비현실의 세계가, 이 아름답고도 고통스러운 추억의 그림책이 전부였다. 이 내면의 세계 가운데 일부라도 건져서 밖으로 내보낼 수 있을까? 아니면 늘 이런 식으로 계속될 것인가? 그러니까 늘 새로운 도시, 새로운 풍경, 새로운 여자, 새로운 체험, 새로운 그림들을 차례로 쌓기만 하다가 결국에는 하나도 펴보지 못한 채 고통스럽고도 아름답게 가슴이 미어지게 하는 이 심란한 추억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인생에 조롱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정말이지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관능의 유희를 즐기며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렇게 살다보면 온갖 짜릿한 쾌락은 맞볼 수 있어도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무상감은 막을 길이 없다. 그렇게 되면 숲속의 버섯처럼 오늘 아름다운 색깔을 뽐내다가도 내일이면 썩어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방어하며 작업실에 틀어박혀 이 덧없는 인생에 하나의 기념비를 세워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일생은 포기하고 단지 하나의 도구 노릇을 해야 한다. 그러면 불멸의 것에 봉사할 수 있어도 메말라버리고 말 것이다. 자유를, 생의 충만함과 쾌락을 잃고 마는 것이다. 스승 니클라우스의 삶이 그러했다.

    그렇다! 모든 사람의 삶은 그 두 가지가 서로 뒤섞일 때에만, 이 무미건조한 양자택일로 인해 삶이 분열되지 않을 때에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예술을 창작하면서도 인생을 그 대가로 지불하지 않아야 한다!
    인생을 즐기면서도 숭고한 창조 정신을 단념하지 않아야 한다!
    그게 대체 불가능한 것일까?
    어쩌면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혹시 정조를 지키면서도 관능의 쾌락 또한 놓치지 않은 그런 남편이나 가장도 있지 않았을까? 가정을 지키고 사느라 자유와 아슬아슬한 모험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가슴이 메마르지도 않았던 그런 사람은 없는 것일까? 어쩌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그러한 이원성과, 대립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여자 아니면 남자로 태어나고, 방랑자가 아니면 보통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이성적이지 않으면 감정적으로 되는 것이다 ㅡ 들숨과 날숨을 동시에 쉰다거나, 남자인 동시에 여자이거나, 자유를 누리면서 질서를 찾거나, 충동대로 살면서 이성을 지킨다거나 하는 것은 어디서도 불가능했다.
    그 중 어느 한쪽을 택하면 반드시 다른 한쪽을 희생시켜야 하고, 어느 한쪽에 못지않게 다른 한쪽도 소중하고 갖고 싶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여성 쪽이 좀더 견디기 수월한지도 몰랐다. 여성들은 저절로 쾌락의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사랑의 행복에서 아이를 얻을 수 있도록 타고난 존재인 것이다. 남성의 경우에는 이처럼 소박하게 결실을 거두는 대신에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그리움을 타고났다.
    하느님이 만물을 그렇게 창조하신 것은 노여움이나 적개심 때문일까?
    혹시 스스로 창조한 피조물의 고통을 즐기시는 것은 아닐까?
    아니다. 노루와 사슴, 물고기와 새, 숲과 꽃, 사계절을 만드신 하느님이 노여워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하느님의 창조에는 균열이 있다.
    실패한 작품이든 불완전한 작품이든 간에, 어쩌면 인간 존재의 바로 이같은 균열과 동경에 특별한 의도가 담겨 있든 말든 간에, 이러한 균열이 하느님의 적이 뿌린 원죄의 씨앗 때문이든 아니든 간에. 그런데 어째서 이런 동경과 불완전함이 죄가 되는 것일까?
    인간이 만들어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모든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은 바로 그런 그리움과 불완전함에서 생겨나지 않는가?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 이 구절을 보고 아! 하며 무릎을 치는 사람이 있으리라.. 그래서 고전은 영원한가. 데미안 → 싯다르타 →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한꺼번에 읽어버린 2011년 6월에 나의 느낌을 한마디로 이야기 한다면...

    "인생 정말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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