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업자득입니다 - 위대한 유산

    2011. 7. 25.

    by. 셰익스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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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람이 재산이다.

    '크리스마스 캐롤'로 잘 알려진 찰스 디킨스의 작품은 만화 또는 영화 등의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접했을 만큼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원전 완역판을 읽을 기회는 많지 않다. 이 책을 추천한 오서경, 정은주 두 분 역시 축약된 문고판으로 처음 접했다고 한다.

    이처럼 대중성도 있고 예술성도 뛰어난 것으로 잘 알려진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1861년)은 핍이라는 어린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그린 고전 명작중의 명작이다. 국내에는 ‘위대한 유산’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제의 뜻은 ‘유산’ 자체가 아니라 ‘유산에 대한 큰 기대’이며, 동시에 당시 사회에 만연한 물질적 기대감을 가리킨다.

    사회적 상승욕은 숱한 근대 서구 문학작품의 주제였는데, 이 작품 또한 ‘신사(gentleman)되기’라는 차원에서 같은 주제를 다룬 성장소설이라 할 만하다. 디킨스 당대의 이상적 인간상인 신사는 구시대의 귀족적인 이상과 부르주아적 이상이 결합된 사람으로, 일정한 재산과 교양에다 ‘신사다운’ 덕목을 두루 갖춰야 했다. 이는 서유럽에서도 가장 먼저 시민혁명을 일으켰지만 귀족계급과 근대 시민계급의 부단한 타협을 통해 진행된 영국 근대사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신사는 일정한 재산과 사회적 신분에 따라 정해지는 지배집단으로서 계급사회 특유의 배타성과 가부장적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주인공인 핍은 대장장이인 매형 조 가저리의 도제로 몇 년을 보내다 런던으로 가서 신사 수업을 받게 된다. 이런 행운은 그가 어린 시절 우연히 도와주었던 탈옥수 매그위치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유형지(流刑地) 호주에서 크게 성공해 번 돈을 그에게 몰래 보내 주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핍은 자신의 후원자는 그가 짝사랑하는 에스텔라를 양녀로 기르는 미스 해비셤일 거라고 근거 없이 추정하며 자기기만의 거만한 길로 빠진다.

    핍의 신사 수업은 진정으로 덕목과 실력을 갖추는 과정과 무관하다. 오히려 신사의 속물적 세계에 동화되어 가던 핍 앞에 어느 날 매그위치가 갑자기 나타난다. 핍은 그동안 자신을 후원해 준 사람이 매그위치라는 것을 알게 돼 큰 충격에 빠진다. 하지만 비로서 은인을 저버리지 않는 인간성을 회복하게 된다. 회한 속에 큰 병에 걸려 누운 핍을 조가 멀리 찾아와 극진히 간호하고 심지어 빚까지 갚아 준다. 자신의 속물성을 뼈저리게 깨달은 핍은 외국에서 사업가로서 노력하여 성공하게 된다. 또 자신이 짝사랑하던 에스텔라가 첫 결혼에 실패한 뒤 과거와 달라진 모습을 보게 된다. 핍은 런던 사교계의 화려함 뒤에 숨은 차별과 착취의 현실을 통해 단련됨으로써 조의 세계가 가진 현실적인 무력함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세계의 인간다움을 간직한 원숙한 인물로 남는 것이다.

    2. 위대한 유산에 대한 다양한 해석

    읽는 과정에서 이 작품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두 편을 보았다. 한편은 원작에 최대한 충실하게 만든 영국 데이빗 린 감독의 1946년도 작품이고, 다른 한편은 미국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1998년에 만든 작품이다. 이 두 영화는 위대한 유산이 무엇인지 각기 다른 해석을 내려서 오히려 나의 독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어린 핍을 그리는 초반부를 제외하면 작품은 전체적으로 당대 사회의 낙관적 분위기와 판이한 환멸의 정조가 지배하며, 신사의 이상이 어떻게 탐욕이나 범죄와 직결되는지를 가차 없이 해부한다. 그러나 에단 호크와 기네스 펠트로가 주연한 1998년도 작품에서는 그야말로 누군가의 도움으로 뉴욕에서 미술작품전을 열게 되고 이를 통해서 속물적인 성공을 쟁취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에 환호한다. 더욱이 작품 전체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평가할 수 있는 우리의 진정한 신사 조 가저리는 시골 어딘가로 쫒겨날 뿐 아무런 교훈도 주지 못하는 이른바 조연에 머물러버린다. 감독은 아마도 위대한 유산을 할아버지의 재산쯤으로 이해한 모양이다. 돈을 좋아하는 나 역시 그런 돈만큼 위대한 것이 무엇일지 쉽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한 그야말로 헐리우드 식 해석이 아닐 수 없다. 미국식 한방주의 해석이 가미된 영화를 보면서 한심한 마음이 드는 것은 10년 사이에 내가 변한 걸까 사회가 변한 걸까. 변하지 않는 것은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에 대한 그 정신 하나뿐인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찰스 디킨스가 이야기하는 위대한 유산이란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를 좀 더 고민하며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에서는 유산을 통해서 런던(또는 뉴욕)생활을 하는 주인공의 성공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원작에서 매그위치가 지원해준 돈은 핍에게 절대로 위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대장간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고백을 하게 만들었다. 물론 작은 호의가 그를 새로운 희망에 젖어들게 만들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마저 작가가 비평하고자 하는 시대의 속물정신을 고스란히 담아 낸 이른바 반전의 장치에 불과하다. 앞서 본 영화들에서는 간과했지만 허버트에게 몰래 투자한 호의가 결국 자신의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는 부분 또한 매그위치의 호의와 더불어 이 책의 핵심주제가 아닐까 한다. 결국 인생은 베푸는 만큼 돌려받는다는 점, 그리고 유산은 전혀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서 내려지는 행운 같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주는 노력의 결과라는 점을 찰스 디킨스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올릭 영감의 고백을 통해서 밝혀지는 누나 죽음의 원인이 핍이라는 점 역시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주제가 작품 전체에 퍼져 있음을 강하게 뒷받침 해준다.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산다. 행복의 골짜기를 떠나 행복을 찾아 떠나는 라셀라스 왕자처럼 나 또한 행복을 항상 열망한다.
    그런데 많은 문학작품들에서는 행복이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고 조언한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도 이와 다르지 않은 교훈을 제시한다. 핍이 원하는 행복은 런던이 아닌 고향 존의 집에 있었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나는 언제쯤 그것을 깨닫게 될까? 궁금해진다.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훈계성의 주제를 지루하지 않고 20분에 한 번씩은 웃게 만들어준 작가의 문장력에 감탄하며 글을 마무리 한다. 고전은 재밌어야 한다는 모토에 부합하는 정말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1946년도 작품 [위대한 유산]의 한장면. 좌측이 진정한 신사인 조 가저리, 가운데가 그의 새 아내인 비니, 맨 우측이 주인공 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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