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비딕을 찾아 떠나는 신나는 모험

    2011. 9. 14.

    by. 셰익스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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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비 딕10점

    1. 인류가 남긴 가치 있는 기록

    (1) 모험 문학의 효시

    《모비 딕》은 한 마리 거대한 흰 고래를 쫓아 5대양을 누비고 장쾌한 해양 소설이자,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그리고 있는 스케일이 웅장한 소설이다. 어린 시절 보았던 수많은 모험항해문화콘텐츠의 효시가 되었으며 특히 배와 배가 만나면서 나누는 사연 부분 등은 현대의 많은 애니메이션 작품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이 된다.

    멜빌이 고래사냥을 소재로 한 작품을 쓰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산과 바다에 끼여 있는 뉴잉글랜드는 결코 기름진 땅이 아니었다. 따라서 개척과 모험심이 충만한 주민들은 대륙의 중부나 서부도 돌진하고, 한편으로는 대서양으로 밀고 나갔다. 고래사냥은 당시 큰 사업이었으며, 그들은 세계 제일의 포경업자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포경선 선원이기도 했던 멜빌은 자신의 체험을 기초로 고래와 고래사냥에 대한 수많은 기록과 문헌을 수집한 후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따라서 세계 제일의 고래사냥국가인 미국을 바탕에 깔지 않고는 거대한 고래를 주역으로 등장시킨 그런 힘차고 특이한 상상력은 창조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배경을 생각할 때 《모비 딕》을 분명히 사상적, 상징적 또는 신비적인 작품이면서도 하나의 해양 모험 소설로 받아들여 즐길 수 있는 작품의 원조적인 구성을 모두 갖춘 수작으로 평가된다. 에이해브 선장과 《모비 딕》과의 오랜 투쟁이나 이슈메일과 추장 퀴퀘그의 우정과 모험 등은 독자의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하다. 당시의 미국 개척, 모험 정신은 이 《모비 딕》을 통해 지구의 거의 모든 지역을 덮은 여러 대양을 향해서 나아가고, 미국인을 중심으로 하는 지구상의 수많은 민족들이 무서운 고래를 쫓아서 결투를 벌이는 것이며, 그것이 끝없는 해양의 장관을 무대로 웅대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것을 산문으로 된 대서사시라고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 아름다운 문장

    서술 형식이 독특하고, 해박하면서 방대한 자료에 근거한 현란한 서술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명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모비 딕》은 한순간에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인칭 서술인가 하면 어느 틈에 3인칭으로 돌변해 있고, 지극히 수필적인 산문이 계속되는가 하면 아주 간단한 장이 나오기도 해서 독자들을 계속 어리둥절하게 한다. 책 후반부에가면 대사와 주변설명만으로 진행되는 연극형식을 갖추는 서술도 발견된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 소설을 그 당시의 독자들이 통일성이 결여된 형편없는 소설로 치부한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좀더 인내심을 가지고 이 소설에 접근해 보면 그 모든 이질적인 서술 형태와 구조들이 묘하게도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독특한 개성으로 드러난다. 그만큼 《모비 딕》은 아주 특이하고 심오한 작품인 것이다. 그것은 난해하고 무질서한 문학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적으로 독자에게 강한 호소력을 지녔다. 우선 이 작품의 이해를 위해 그 시대의 미국이란 나라의 배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 미국은 신생 독립국이었고, 난숙한 근대 문명의 고장은 아니었다. 거칠고 굳센 개척자의 생활이 기반이 되어 힘차게 뻗어가는 나라였다. 그런 한편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이른바 청교도적인 엄격한 종교 정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잔뜩 죄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자유, 민주 정신과 격렬한 생존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식인과 작가들은 대부분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 신성과 수성, 선과 악이라는 갈등과 모순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초월적 이상주의로 치닫고, 어떤 사람은 좌절과 절망의 늪에 빠지고, 어떤 사람은 전원 속으로 도피하고, 어떤 사람은 민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뉴잉글랜드의 작가 에머슨, 호돈, 롱펠로, 로얼 등이 나왔고, 뉴욕에서는 멜빌과 휘트먼이, 남쪽에서는 포가 나왔던 것이다. 제각기 독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무언가 공통적인 흐름이 있었다. D.H. 로렌스는 <미국 고전 문학 연구>에서 그들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나란히 놓고 '세계가 그들을 두려워 했다. 지금도 두려워하고 있다.' 고 표현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멜빌이 그러한 표현에 해당되는 작가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3) 짜임새 있는 구성

    이 비극적인 서사시를 줄거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3부 구성으로 나눌 수 있고, 지역을 중심으로 보면 4부 구성으로 분할할 수 있다.

    1) 줄거리에 따른 구성

    제1부는 이슈메일의 갖가지 사건과 환경, 그리고 이 항해(航海)가 보통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의 서론 부분이다.

    제2부는 《모비 딕》을 추적하여 대서양에서 희망봉을 돌아 태평양으로 방황하는 동안의 갖가지 비극적 해상 생활과 고래에 대한 고증, 고래의 상태와 용도 등 온갖 사상을 치밀하게 기술한 부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추적, 결투 패배, 피쿼드호의 침몰에 이르는 것이 마지막 3부라 할 수 있다.

    2) 지역에 따른 구성

    제1부는 이슈메일과 퀴퀘그를 중심으로 한 낸터킷에서의 항해 준비 부분,

    제2부는 대서양을 항해하고 있을 때의 에이해브 선장과 선원들에 관한 이야기 부분,

    제3부는 인도양에 피퀴드호가 웅대한 모습을 나타냈을 때의 고래에 대한 서술 부분,

    제4부는 태평양에 등장한 피퀴드호가 《모비 딕》과의 사투를 전개하기까지이다. 마지막 일본 앞바다에서 잡히는 부분 때문에 서양의 항해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일본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고, 초기에 우리나라에 중역되어 소개된 것이 대부분 일본어 작품인 듯하다. 특히나 올 초에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김석희가 번역한 '작가정신'판은 국내 완역본으로는 거의 최초라는 언급이 있었다.

    (4) 인류 최대의 서사시

    이제 이 작품을 어째서 한 편의 대서사시로 비유하는 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 이 작품에는 우선 해양과 하늘과 별, 그리고 죽음과 운명과 악에 관한 암울한 형이상학적인 명상이 흐르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밝고 활달한 유머가 터져 나온다. 그것은 때로 사회와 인생에 대한 신랄한 풍자로 어느 틈엔가 바뀌기도 하나 때로는 깊은 절망의 소리로 변하기도 한다. 그리고 환상의 안개 속을 방황하는가 하면 이윽고 현실의 장엄한 민주주의의 외침이 일어나기도 한다. 개척자 정신의 미국적 서사시로서 손색이 없는 장엄한 스케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구성의 다면성이나 서사시적 스케일에만 문학적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 그런 것 뒤에 은밀히 감추어져 있는 사상성, 상징성, 신비성을 우리는 마지막으로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사상성과 상징성을 논의한다는 것은 흡사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만큼이나 독단적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철학적으로, 어떤 사람은 사회학적으로, 또 어떤 사람은 정신분석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접근하려고 하고 있어 갖가지 각도에서 해석이 내려지고 있다. 그것들은 각각 어느 한편으로 진실을 포착하고 있기는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각기 억지로 말을 끌어다 붙여 조리에 맞추려고 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징이란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경우에는 진정한 상징이 아니기 때문이다. 번민의 극에서 넓은 세계를 찾아 나서는 이슈메일과 야만인 퀴퀘그와의 결합은 이 작품에서 지극히 따뜻한 인간적인 결합을 부여한다.

    매플 목사의 설교는 이 작품을 꿰뚫는 적극적 사상의 척추를 이루고 있지만 마지막에 이슈메일이 매달려 살아나게 되는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죽음과 소생의 관념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리고 편집광적인 의지의 인간 에이해브와 이성의 인간 스타벅의 대립, 세 키잡이와 세 작살잡이, 또 악마적인 배화교도 페들러 등도 그 극적인 박력 외에 선과 악, 문명과 야만성, 싸움과 평화 등으로 우리의 생각을 달리게 하지만 그 정확한 상징의 의미는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2. 《모비 딕》은 어떤 존재인가

    이 작품은 모험소설의 원조 격에 속한다. 그러나 단순히 《모비 딕》이라는 괴물고래 자체 보다는 《모비 딕》와 대결하는 에이해브 선장의 내면의 싸움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철학서 같은 느낌이 더 강한 작품이다.

    미국이 낳은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허먼 멜빌이 1851년에 발표한 이 작품은 포경선 선원들의 해상 생활, 백과사전을 방불케 하는 고래 정보, 인간 내면의 선과 악, 여러 인종들 간의 만남 등을 장엄한 규모로 다룬 소설이다. 멜빌이 살았던 19세기는 포경업이 큰 번영을 이루던 시기였고 실제로 고래잡이배를 괴롭힌 포악한 고래가 있었던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멜빌은 1820년 고래의 공격을 받고 침몰한 에섹스호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모비 딕》을 완성하게 된다.

    이 소설의 초판은 1851년 10월 런던에서 <백경>라는 책명으로 먼저 나왔고, 한 달 후 뉴욕에서 《모비 딕》이라는 제목으로 미국판이 출판되었다. 멜빌이 심혈을 다해 써서 출판한 야심작이었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냉담했고, 기존 소설의 정형을 너무 무시한 당돌함 때문에 나다니엘 호돈 같은 친구 소설가도 당황할 지경이었다. 완전히 묻혀져 버린 《모비 딕》을 사람들이 다시 찾아 읽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레이몬드 위버라는 한 탁월한 학자의 안목 때문이었다. 멜빌이 죽은 지 30년이 지난 1921년에 위버가 정열을 다해 쓴 평론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갑자기 《모비 딕》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멜빌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난 듯 영국이나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정복을 꿈꾸는 일본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단테나 셰익스피어, 밀턴이나 도스토예프스키와 비교해서 그의 위대성을 논하는 평문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멜빌의 위대성은 당시의 사람들보다 100년을 앞서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다.

    이 작품의 화자는 이슈메일이지만, 이야기의 중심에는 전설적인 흰 고래 모비 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뒤, 오직 《모비 딕》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전세계의 바다를 누비고 다니는 에이해브 선장이 있다. 에이해브에게 있어 《모비 딕》은 자신의 삶을 옥죄는 ‘악의 화신’으로, 목숨을 내걸고서라도 반드시 없애야 하는 존재이다. 에이해브는 《모비 딕》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여기며,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에이해브의 모습에서 불굴의 도전 정신으로 고난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의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에이해브는 개인적인 원한을 계기로 하여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악의 화신'에 대한 도전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모비 딕》은 단순히 ‘인간을 위협하는 악’으로만 볼 수 없다. 모비 딕은 인간이 결코 범접할 수 없고 패배시킬 수도 없는 ‘신’ 또는 ‘자연’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는 오랫동안 자연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 여기며 무분별하게 착취했고, 그 오만방자한 태도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나는 《모비 딕》을 '인간의 꿈'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인간의 꿈'이란 지난번 '데미안'을 읽으면서 고민해보았던 부분인 삶의 목적이나 가치를 찾는 것처럼 인류가 오랜 옛적부터 오늘날까지 추구해 온 것, 추구하기 위해서 치러 온 모든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에이해브가 맞닥뜨리는 《모비 딕》과의 싸움은 어쩌면 자기와의 싸움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도전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에이해브는 죽을 줄 알면서도 왜 《모비 딕》에게 복수를 꿈꾸는가?

    사실 우리는 모두 죽어가고 있으며 죽으면 없어져버릴 것이 너무나도 명확한 제한된 꿈을 살아있는 동안에 이루고자 희망한다. 그 꿈을 이루면 죽는 것만이 남아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면에서 《모비 딕》은 에이해브의 삶의 목표일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비 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인종 문제이다. 기독교인이자 백인인 이슈메일은 낸터컷 섬으로 가는 도중 이교도에 문신을 한 폴리네시아 인 퀴퀘그를 만나고 함께 피쿼드호에 오르면서 진한 우정을 나눈다. 당시 백인 우월주의를 앞세워 유색인종과 이교도들을 무참히 짓밟던 19세기 미국의 모습이 이 피쿼드호 안에서도 그대로 존재하는데, 멜빌은 유능한 작살꾼이자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춘 퀴퀘그의 모습을 부각시키면서 인종 차별이 극에 달했던 당시 미국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3. <한 배>를 타고 떠나는 고래사냥

    우리는 한배를 탄 운명이라는 말이 꼭 맞는 경우가 간혹 있다. 군대에서도 많이 쓰이지만 같은 목표를 향해서 나가는 조직의 운명을 일컫는 경우 이보다 좋은 말이 있을까 싶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책에서 묘사하는 에이해브의 모습이 우리의 그분과 너무도 똑같다는 점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불굴의 의지, 강인한 추진력, 무엇보다도 강력한 카리스마와 철저한 고립. 그렇다보니 《모비 딕》을 추격해서 정복하려는 것을 독서교육에 대한 투지를 최종목적지로 삼고 투쟁하는 그분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에이해브와 《모비 딕》과의 관계와 그 《모비 딕》이 무엇을 표상하는가에 대해 각자가 처한 상황을 대입시키면 좀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포경선은 일반적으로 약 서른 명 정도의 선원이 3년간 항해한다고 한다. 그리고 선장을 보좌하는 세 명의 간부항해사가 등장한다. 인원은 좀 많고 기약은 없지만 우리도 독서교육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가기 위하여 한 배를 탄 선원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한 배>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사장님과 두 분의 본부장은 <피쿼드호>를 지휘하는 스타벅과 스터브, 플래스크와 동일한 입장에 있다. 항해사들은 겉으로는 화려해보이지만 사실상은 온종일 선장과 씨름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심지어는 선장과 함께 밥 먹는 자리에서는 선장의 식사속도에 맞추기 위해서 고기도 배불리 먹을 수 없고, 워낙에 엄숙한 가운데 식사하느라 기침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라고 토로한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에이해브라도 혼자서 고래를 잡을 수는 없는 법이다. 믿고 함께 할 수 있는 선원이 필요하다. 회사직원도 그런면에서 다르지 않다. 그래서일까 에이해브 선장은 시간이 날 때마다 선원들을 모아놓고 비전을 제시한다.

    “오오, 남들을 불타오르게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남에게 불을 붙이려면 성냥 자체도 파괴되어야 한다! 나는 과감하게 내가 원하는 일을 했다. 앞으로도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할 것이다. 그들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나는 악마가 붙은 미치광이다. 나는 미쳐버린 광기다. 그 사나운 광기는 자신을 이해할 때에만 잠잠해진다. 나는 팔다리가 잘릴 거라는 예언을 들었다. 그리고 아아! 나는 다리를 잃었다. 이제 나는 내 다리를 자른 놈의 몸을 잘라버릴 거라고 예언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예언자이자 그 실행자가 된다. 그것은 위대한 신들 이상이다. 위대한 신들도 지금까지 그런 적은 없었다. 위대한 신들이여, 나는 당신들을 비웃고 야유한다.”

    이처럼 에이해브는 두려움을 모르는 과감한 추진력의 소유자이며 끊임없이 선원들을 자극하고 독려한다. 흰 고래를 공공의 적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를 역설하고 큰 보상을 제시한다. 기둥에 박힌 스페인 금화가 그 예가 될 것이다. 에이해브는 선원들은 돈만 많이 주면 쉽게 다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도구 중에서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도구가 사람이라면서 꾸준한 정신교육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 목적으로 매달 월례조회를 통해 우리는 에이해브를 만난다. 헛된 복수심 때문에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지만 경험 많은 에이해브의 리더십으로 인해 피쿼드호가 희망을 갖고 항해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한 배도 올바른 목표만을 바라보고 안전한 운행을 한다면 직원들 모두가 행복하게 꿈과 희망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책과는 조금 다른 해석일지 모르겠지만 고래잡이라는 직업이 생소한 우리나라에서는 현실적인 삶에 억눌린 도시인들에게는 꿈과 희망을 상징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예전에 유행했던 송창식의 고래사냥이 《모비 딕》을 읽고 나서는 좀더 새롭게 들리는 건 아마도 꿈과 희망을 찾아 떠나고 싶어도 떠나고 싶은 이상을 아직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4. 내가 에이해브였다면...

    에이해브의 강력한 지도력과 고집으로 운행되는 <피쿼드호>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는 배였다면 결말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알려진 바와 같이 민주주의라는 것은 의사 결정시 전체적인 구성원의 의사를 반영, 실현시키는 사상 및 정치 사회체제이다. 구성원간의 토론과 토의가 의사결정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미국의 국가신용등급 하락은 워싱턴 정가에 대한 신뢰의 도산이나 마찬가지인데도 국가부채 한도 증액 문제를 놓고 미 정치권은 진흙탕 강아지싸움을 벌였다. 재정 파탄으로 나라는 부도 위기에 몰려 있는데 여야는 국정을 볼모로 치킨게임(두 사람이 각각 자동차를 타고 서로에게 돌진한다. 이때 누군가가 핸들을 돌려 피하지 않으면 양쪽 모두 죽게 되지만, 누군가가 피한다면 먼저 피하는 사람이 겁쟁이(chicken)가 되어 결국 게임에서 지게 된다.)에 몰두했다. 국가보다 당리를 앞세웠다는 것이 싸움을 지켜본 미 국민 절대다수(82%)의 소감이다(뉴욕 타임스·CBS 여론조사). 그런 의미에서 만약 피쿼드호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운행되었다면 《모비 딕》도 만나지 못한 채 산으로 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에이해브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한을 갖는 대표적인 사례로 최근 강대국으로 부각이 되고 있는 중국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공산당 단독 정당만 운영하고 있는 중국은 국가정책만족도에서 2011년 85%로 가장 높은 만족도를 보였다. 2009년과 2010년에도 87%로 최고를 기록했다. 중국 정부는 미국에서 나온 이 조사 결과를 중국식 정치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자료로 역이용하고 있다. 제 국민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주제에 중국에 대고 정치개혁이니 민주화니 하는 턱도 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며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을 공박하고 있다.

    공산당 일당독재에 기반한 중국식 정치체제의 이점은 정치 엘리트를 장기간에 걸친 당내 경쟁과 검증 과정을 통해 발탁하고, 일단 최고 지위에 오르면 장기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론을 중시하는 집단지도체제의 특성상 일인독재를 할 수도 없다. 선거를 의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장기적 관점의 국정 운영이 가능하다. 박정희시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가능했던 것도 아마 이와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득표로 말을 하는 민주주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집권과 재집권을 위해서는 유권자의 표심을 장악해야 한다. 장밋빛 공약을 남발하고, 정당 간 과열경쟁은 포퓰리즘과 당파주의로 흐르기 십상이다. 표가 없는 미래 세대보다 표를 가진 현재 세대를 의식하기 때문에 백년대계는 이론에서나 가능하다. 불균형 성장 이론으로 유명한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은 1970년 출간한 『이탈, 반발, 충성(Exit, Voice, and Loyalty)』이란 책에서 조직과 체제에 대한 실망은 결국 이탈이나 반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목소리를 내는 것도 조직이나 체제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을 때 얘기지, 완전 실망하면 마음과 몸이 떠나기 마련이란 것이다.

    에이해브와 사사건건 대립했던 스타벅은 모비딕을 잡고자 하는 선장의 생각에는 반대했지만 인간적으로는 누구보다도 에이해브를 아끼고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배안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누구보다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만약 선장과 생각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바다 한복판에서 폭동을 일으켰다면 우리는 <피쿼드호>의 이 역사적인 항해기록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모비 딕》이라는 목표에 도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것이 악이건 선이건, 꿈이건 간에 말이다). 배가 이미 항구를 떠났기 때문에 큰 충돌은 모두에게 고통만을 주게 마련이다. 이러한 무의미한 충돌을 피하고자 스타벅은 대국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모두가 함께 공동운명체라는 공감대를 끝까지 이끌어나간 것이다.

    결론적으로 에이해브의 강력한 지도력이 항해의 목적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에는 충분히 수긍을 한다. 하지만 선원들에 대한 다소 과격한 통제는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중국의 정치체제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면 중국식 정치체제가 서구 민주주의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중국에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는 최근 발생한 고속열차 사고를 둘러싼 보도 통제에서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면 중국의 일당독재는 유지될 수 없다. 중국식 정치체제의 딜레마다.

    스타벅은 여기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 뛰어난 항해사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에이해브의 강력한 지도력이 발휘될 수 있었으며, <피쿼드호>는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 <한 배>도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안전하게 운행 할 수 있으려면 보다 유능한 스타벅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에이해브는 선원들에게 좀 더 많은 표현의 자유를 주고 이야기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기회를 많이 가지면서 배를 운행해야 한다. 혼자서 성공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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