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 게바라에 대하여

    2014. 8. 1.

    by. 셰익스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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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바는 몰라도 체 게바라는 안다. 이게 요즘 현대인들의 아이러니이다. 
    체 게바라를 쿠바의 혁명을 주도했던 게릴라라는 정도로는 많이들 알고 있다. 하지만 체 게바라를 이해하려면 조금의 지식은 더 쌓아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체 게바라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 그가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나라에서 체 게바라는 어떤 의미일까?> 
    2013년 광복절 기념행사에서는 광주시립소년소녀합창단에서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공연을 한 것이 이슈가 된 사례가 있다. 학생들이 광복절을 기념하여 기획한 공연에 보수언론이 색깔론을 제기한 것이다. 이에 지휘자는 9월 4일 사임의 뜻을 밝혔다.

    지휘자 A씨는 이날 언론사로 배포한 장문의 사임사를 통해 체게바라 의상의 파동을 겪으면서 본인이 당했던 고통, 예술에 대한 회의, 문화수도 광주의 이중적인 모습을 비판했다.

    A씨는 “기분 좋게 공연 잘 하고 내려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뉴스들, 상상 이상의 댓글들을 보며 단원들이 끊임없이 걱정했다”면서 “눈 깜짝할 사이, 나라를 팔아먹은 중죄인이 되어 있었다. 오늘 광주시립소년소녀합창단의 지휘자직을 사퇴한다”고 밝혔다.

    이어 A씨는 “광복절 행사가 끝난 직후, 상황 파악을 위한 경위서를 작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진상을 파악한다는 명목 아래, 관은 ‘질문지를 작성해 메일로 보낼 것’, ‘원래는 심문을 해야하는 데 이것은 예우를 해주는 차원임을 분명히 알 것’ 등을 상기시키며 1차·2차 출석을 통보 받았다”면서 “참 아이러니하게도 예술을 행하고 지원하는 이 곳에서 익히 통용되는 사고는 ‘너무 열심히 하려하지 말고, 머리 아프게 시끄럽게 하지도 말고, 책 잡힐 짓은 아예 하지도 말고 조용히 있는 것이 상책!’이라는 경직된 무사안일주의적 사고”라고 꼬집었다.

    특히 A씨는 “항상 변화와 창조라는 그럴듯한 팻말을 겉으로는 내세우지만 그것을 행하는데 있어 뭔가가 머리 아파지고 시끄러워지면 슬며시 발을 빼는 일관성 없는 환경”이라고 공직사회의 풍토를 꼬집었다.



    A씨는 “광주광역시로부터 8월 15일 ‘광복절 경축행사’를 의뢰받았던 취지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번에는 미래를 향한 청소년들만의 역동적인 퍼포먼스로 행사를 빛내달라. 여러분이 출연해주면 그 어느때보다 뜻깊고 감동적인 무대가 될 것’이었다”면서 “편협되고 엄격한 잣대, 보수주의적 시각에서 경직되고 엄숙한 자리에 어울리는 복장이 그리도 중요했다면, 왜 자유분방한 청소년들의 역동적인 퍼포먼스를 그토록 원하셨는지 되묻고 싶다”고 따졌다.

    이어 “우리 모두의 열정과 노력이 내용물이 아닌 포장지 색에 불과했던 티셔츠 한 장에 짓밟히고 가리워졌다”면서 “일명 ‘체 게바라 티셔츠’ 소동은 ‘징계 안하기로!’ 마무리되면서 제자리로 돌아와 보이는 것 같겠지만, 실제로는 긴 시간 힘들게 모으고 다져왔던 우리들의 특별한 에너지를 산산조각 냈다”고 한탄했다.

    <스페인의 식민지, 미국의 속국 쿠바>
    쿠바는 오랫동안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었던 국가이다. 그것을 1903년 미국이 빼앗았다.  
    먼저 쿠바에는 수천 년 전에 타이노족 등 원주민이 농경 등을 영위하고 있었으나, 15세기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쿠바에 건너온 이후 19세기까지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었다. 16세기 초부터 스페인사람들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수입하여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17∼18세기에는 흑인들이 여러 차례 해방투쟁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의 가혹한 탄압으로 끝을 맺었다. 쿠바와 미국 간의 긴밀성은 쿠바의 역사에 매우 많은 영향을 끼쳐 미국은 끊임없이 쿠바를 지배하려고 넘보았다. 19세기에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와 호세 마르티는 각각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은 쿠바의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고, 군사 통치자 발레리아노 웨일러(Valeriano Weyler)는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1898년 미국의 메인 호가 아바나 항에서 정박 중에 폭발한 사고(후에 미국의 자작극으로 확인되었다.)을 구실로 미국이 일으킨 미서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스페인은 쿠바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종전 후 3년 동안 쿠바에서는 미국 군대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으며, 1903년에는 관타나모에 미국 해군의 기지가 설치되고 쿠바의 중추적 기능을 미국 자본이 장악하는 등 쿠바는 미국의 사실상의 식민지가 되었다. 


    <군인들과 바티스타의 독재>
    1930년 마차도의 쿠데타 이후로, 10여 년간 계속 군사 정권이 들어섰다. 
    1940년 쿠바 자유당의 바티스타는 선거로 정권을 획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삶의 질은 향상되었으나 빈부 격차도 극심해졌다. 1952년에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바티스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얻어냈고 바티스타에 대항한 1956년 바르킨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독재자 바티스타가 미국을 등에 업고 30년간 지배하여 빈부격차를 심화시켰다. 


    <공산주의 혁명>
    여기에 반감을 갖게 된 민중을 대신하여 카스트로 형제와 체 게바라가 힘을 합쳐 게릴라전을 펼쳤고 결국 독재자를 물리치고 쿠바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게 된 것이다. 이때 쿠바는 미국에 대항하여 소련의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게 된다. 
    1959년 카스트로가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고, 1961년에는 그 혁명이 공산주의 혁명임을 천명하였다. (이 때 쿠바는 프로 야구인 큐반 리그를 없애 버렸다.) 
    이후,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쿠바 혁명 때부터 1993년까지 쿠바의 독재정권을 피하고자 120만 명의 쿠바인이 쿠바를 탈출하였다. 1970년대 쿠바는 볼리비아, 앙골라 등의 무장 봉기를 지원하였고,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해당 국가의 독재자들을 원조하였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소련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쿠바는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1993년에는 일부 민간 경제에서 미국과의 교류를 허용하였으나 미국은 금수 조치로 일관하였다. 양심수가 500명에 이른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쿠바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미국으로부터 인권 침해에 대해 비판받아 왔다. 하지만 쿠바인들의 카스트로에 대한 지지는 절대적이다. 2008년, 피델 카스트로의 건강이 악화되자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가 새로운 국가평의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쿠바의 영웅 피델 카스트로>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가 미국의 반식민지가 되었던 것은 미국의 선전을 국민들이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국력을 교육에 집중하였다
    1959년 쿠바혁명 이후 카스트로 정권은 교육 사회 복지 부문에 대한 투자 비율을 강화하고 관련 예산이 국가 예산의 16%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농촌의 문맹률이 크게 하락하였고 대학을 포함한 모든 교육은 무료로 제공한다. 유치원을 거쳐 예비학교 1년,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은 의무교육(obligatorio)이며 이후 고등학교, 대학교로 이어진다. 초등학교에서는 학급을 20명으로 하거나, 서브티쳐(sub-teacher)를 도입하고 있다. 고등학교 과정은 크게 직업교육을 목적으로 한 실업계고등학교, 대학교 진학을 목적으로 한 인문계고등학교, 예술고, 체육고로 나뉜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모두 교복을 입으며, 학년에 따라, 기숙사 여부에 따라, 전공에 따라 교복의 색과 무늬가 달라진다. 특히 농촌에서 높았던 문맹률 일소 운동을 전개하여 문맹률이 낮아졌다. 2002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15세 이상 국민의 문자해독률은 99.8%이며 이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와 함께 라틴 아메리카 최고 수준이다. 또 국민의 대다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주요 고등 교육 기관으로 1728년에 개교한 아바나 대학 등이 꼽힌다. 2001~2002년 기준으로 19만 1262명의 학생이 고등 교육을 받았다. 
    또한 쿠바는 학교 교육에서 스포츠에 주력하고 있으며 특히 야구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필수 과목으로 도입했고 쿠바 최고의 인기 스포츠이다.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
    카스트로 형제가 현재까지 50년 이상 집권하고 있는 것과 달리, 체 게바라는 집권 직후 수교국가들의 대통령들을 접견하고 세계를 다니면서 미국 못지않게 소련에도 반감을 갖게 된다. ​그러던 중 공식석상에서 소련에 쓴소리를 하고나서 공공의 적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에 따라 체 게바라는 소련의 원조가 필요한 카스트로에게 부담될 것을 꺼려하여 쿠바를 떠나게 된다. 
    이것이 체 게바라의 실책이며 그를 영웅으로 만들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한다. 

    카스트로가 혁명을 통해 실권을 장악하여 한 평생 성공한 통치자가 되었던 것과 달리, 
    체 게바라는 남미의 다른 나라도 미국으로부터의 종속을 떨쳐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다른 남미국가에도 쿠바와 같은 성공적인 혁명을 꿈꾼다. 이미 미국의 적이자 동시에 소련의 적이 되어 세계적으로 고립되어버린 체 게바라는 고생끝에 볼리비아에서 새로운 혁명을 준비한다.  
    쿠바에서는 카스트로가 있었지만 볼리비아에서는 스스로가 대장이 되어야 했던 체 게바라는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그리고 정부군에게 진압되어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다. 


    체 게바라 평전

    저자
    장 코르미에 지음
    출판사
    실천문학사 | 2011-05-16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아르헨티나 의사 출신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독재에 대항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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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아서 몇 년전에 읽다 포기했던 적이 있다. 
    남미의 제임스딘이라는 체 게바라라는 인물은 이루어 놓은 것에 비해 과도하게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잡은 '체 게바라 평전'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그의 인기가 비단 외모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의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쿠바 혁명의 성공을 모든 남미에 확대하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혁명에 뛰어든 몽상가이다. 
    그 꿈은 비록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가 남긴 혁명적인 교훈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그런면에서 또하나의 위대한 게츠비인 셈이다. 
    지금부터 나에게는 '위대한 체 게바라'로 불리울 것이다. 

    <쿠바의 미래>
    멕시코, 과테말라 등지에서 일하던 한국 농민들이 쿠바로 이주해 에네켄 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하였다. 그 후 한국 전쟁 때 쿠바의 경제 원조를 지원받고 대한민국과 국교를 맺게 되었으나, 쿠바가 공산주의 국가로 바뀌면서 지금까지 외교관계가 없는 상태이다. 반면, 비슷한 이념을 가진 북한과는 수교하였다. 쿠바 정부는 정부가 대규모로 통제하는 계획경제를 조직하는 데에 공산주의 정책을 고집하고 있다. 

    생산수단의 대부분은 정부가 소유·운영하며, 정부가 대부분의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사기업의 인력 분담율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1981년 공공부분이 91.8%, 사기업이 8.2%의 인력을 고용한 것에 비하여, 2006년에는 공공부분이 78%, 사기업이 22%의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자본 투자는 제한적이며 정부가 승인하여야 가능하다. 게다가, 쿠바 사람을 고용하고자 하는 기업은 쿠바 정부에 임금을 지급하고, 쿠바 정부가 다시 해당 근로자에게 쿠바 페소로 임금을 지급한다.

    쿠바 정부는 이론적으로는 계급 특권을 부정하는 입장이지만, 공산당원 또는 정부에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우대가 존재한다. 
    교통, 직업, 주거, 대학 교육 그리고 보다 우수한 보건 혜택을 받는 것은 정부나 또는 공산당 내에서 신분을 가져야 가능하다. 
    1980년대 말부터 쿠바의 국가 운영 경제에 대한 소련의 보조금이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 쿠바에게 소련은 수출의 보호무역 시장이었고 많은 경제 원조의 주역이었다. 소련은 쿠바산 사탕수수를 시장보다 높은 가격에 사 주었고 석유를 시장보다 낮은 가격에 쿠바에 공급해 주었다. 한때 쿠바가 소련으로부터 받는 보조금은 60억 달러에 달하였다. 이 보조금이 사라지자 쿠바의 경제는 "페리오도 에스페시알 엔 티엠포 데 파즈"(Periodo especial en tiempo de paz)라 불리는 급속한 경기불황에 직면하였다. 

    1992년에는 미국이 쿠바에 대한 통상금지조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일부에서는 이것이 쿠바 사람들의 삶의 질을 1년 내에 위기 상황로 몰아가는 데에 일조했다고 보고 있다.
    소련이 붕괴됨에 따라, 다른 공산주의·후(後)공산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쿠바는 소련의 원조의 종결을 벌충하여, 식량, 소비재, 서비스 산업의 부족을 완화시킬 제한적인 자유 시장 수단을 취하였다. 이러한 수단들은 일부 소매와 경공업 분야에서의 자체적인 고용과 기업계에서 미국 달러 사용의 합법화, 그리고 관광 산업의 육성을 포함한다. 
    1996년, 관광산업은 사탕수수 산업을 제치고, 쿠바가 경화(硬貨)를 벌어들이는 가장 큰 자원이 되었다. 쿠바는 최근 10년간 카리브해 지역의 관광산업에 있어서 시장점유율을 3배나 올려놓았다. 이것은 관광산업의 인프라에 많은 투자를 한 결과이며, 이러한 성장율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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