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고전을 읽는가 - 이탈로 칼비노

    2015. 3. 27.

    by. 셰익스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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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전이란 사람들이 "나는 '죄와 벌'을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죄와 벌'을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않는 책이다.

    동사 ‘읽다’ 앞에 붙은 ‘다시’라는 말은 유명 저작을 아직 읽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하는 궁색한 변명에 해당한다. 그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말을 하자면, 아무리 폭넓게 책을 읽어왔다고 해도 읽지 못한 책이 아주 많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프랑스 문학가 미셸 뷔토르는 미국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수 년 동안 사람들이 자꾸만 자신이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에밀 졸라에 대해 질문해오는 통에 지쳐버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뷔토르는 <루공마카르 총서>를 통독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책이 자신이 상상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루공마카르 총서>는 신화적인 인물의 계보학과 우주 기원론을 다룬 너무나 멋진 책이었던 것이다. 뷔토르는 자신의 이러한 발견을 이를 주제로 한 훌륭한 논문으로 남겼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우리는 위대한 작품을 처음 읽을 때 매우 독특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며 그러한 즐거움에는 어린 시절 읽을 때 느낀 것과는 매우 다른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경험이 그러하겠지만 어린 시절에는 읽는 책 모두에 독특한 흥미와 중요성을 부여하게 마련이다. 반면 성인이 되어 읽으면 세밀한 부분과 다양한 면모 또 그 의미를 감상하게 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정의를 내려볼 수 있다.


    2. 고전이란 그것을 읽고 좋아하게 된 독자들에게는 소중한 경험을 선사하는 책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조건에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사람만이 그러한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는 인내심도 부족하고 집중력도 약한 데다 읽는 방법도 서툴고 경험도 부족하기 때문에 큰 가치를 얻지 못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독서가 큰 의미를 주는 것은 어린 시절의 독서가 우리가 생각의 틀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을 때다.

    기억에서 사라졌을지라도 성인이 되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우리는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핵심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다시 고전을 정의할 수 있다.


    3. 고전이란 특별한 영향을 미치는 책들이다.

    그러한 작품은 우리에 각인될 때나 집단의 무의식에 있을 때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이 되어도 어린 시절 인상 깊게 읽었던 작품에 대한 재발견을 반드시 하게 된다. 작품은 그대로이지만 우리 자신이 작품 자체를 바꿔놓기도 한다. 또 작품을 다시 읽을 때마다 그 작품을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따라서 읽는다고 말하느냐, 다시 읽는다고 말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고전을 다시 정의내릴 수 있다.


    4. 고전이란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뭔가를 발견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책이다. 


    5. 고전이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우리가 다시 읽는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6. 고전이란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한 책이다.


    7. 고전이란 이전에 행해졌던 해석과 함께 찾아오는 법이며 그것이 한 문화 혹은 여러 다른 문화들에 남긴 과거의 흔적들을 우리 눈앞에 다시 끌어오는 책이다.

    이러한 정의는 고대와 현대의 고전 모두에 해당된다. 오디세이아를 다시 읽는다면 나는 분명 호메로스의 글을 읽는 것이겠지만 오디세우스의 모험이 수 세기 동안 사람들에 의미했던 모든 것을 떠올리게 된다. 또한 원전이 그러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지 찾아보게 될 것이다.

    카프카를 다시 읽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형용사로 쓰는 ‘카프카적인’의 의미에 동의하는지 아닌지를 작품 속에서 찾을 것이다.

    뚜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읽는다면 나는 책 속의 인물이 우리 시대에 어떠한 유형으로 끊임없이 부활하고 있는지 생각할 것이다. 고전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이전에 생각했던 이미지와 비교해보면서 새삼 놀라게 된다. 이것이 고전에 대한 2차 서적이나 해석본을 피하고 원전을 직접 읽으라고 계속해서 충고해야 한다. 2차 서적들을 읽지 않을 때 고전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수많은 서문 비평문 참고 서적들은 연막처럼 차단한다. 여기에서 도출될 수 있는 정의는 다음과 같다.


    8. 고전이란 그것을 둘러싼 비평담론이라는 구름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평의 구름들은 언제나 스스로 소멸한다.

    고전이라고 해서 반드시 우리가 미처 알지 못 하는 것들을 가르쳐줄 필요는 없다. 고전은 때때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떤 것을 혹은 우리가 잘 안다고 믿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고전 작품이 그것을 처음 알려줬다는 사실을 혹은 그것이 다른 작품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는 못 한다. 잘 아는 사실을 고전에서 발견할 때 우리는 놀라워하면서도 큰 만족감을 느낀다. 우리가 그러한 사실의 원천을 발견하거나 다른 작품과 맺는 관계를 알게 될 때 어떤 저자가 그런 이야기를 처음 했는지를 알게 될 때 말이다.


    9. 고전이란 사람들로부터 이런 저런 얘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생각들을, 창의적인 생각들을 발견하게 되는 책이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고전작품이 독자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때 일어난다. 작품을 읽을 때 아무런 불꽃이 일지 않는다면 독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무감이나 무조건적인 경외의 관점에서 읽는 것은 소용이 없다. 오직 그 작품이 좋아서 읽어야 한다. 학교에서 읽는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일정한 고전을 습득하도록 하는 것은 학교 교육이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작품들 가운데서 우리는 나중에 나만의 고전을 발견하게 된다. 학교는 기본적인 틀을 가르쳐줄 뿐이다. 자유롭게 읽는 때에야 우리는 자신만의 책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아는 뛰어난 미술사가 한 명은, 많은 책 중에서도 피크위크문서를 특히 아끼는 책으로 꼽는다. 그는 항상 디킨스의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자기 삶의 모든 부분을 이 책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와 연관시키곤 했다. 그가 보는 우주며 세계를 보는 철학은 조금씩 전체적인 동일화 과정을 거치더니 피크위크문서 그 자체가 되어갔다.


    10. 고전이란 고대 전통사회의 부적처럼 우주 전체를 드러내는 모든 책에 부치는 이름이다.

    그러나 고전은 개인과 일치되는 관계뿐만 아니라 반대의 관계를 정립하기도 한다. 나는 장 자크 루소가 행하고 생각했던 것을 모두 마음에 간직하고는 있지만 한편으론 그것을 반박하고 비판하며 맞붙어 논쟁하고픈 열망을 시시때때로 느낀다. 물론 이는 그와 나의 기질이 달라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춘다면 나는 단지 그의 작품을 읽지 않으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역시 나의 작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1. 고전이란 우리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으며 그의 작품과 맺는 관계 안에서 마침내는 그의 작품과 대결하는 관계 안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여기서 고전이라는 단어를 예스러운 것이나 어떤 양식 혹은 그것이 지닌 권위에 따라 구별하지 않고 있음을 굳이 증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믿는다. 여기서 내가 고전을 구분하는 기준은 어떤 문화 안에서 고유의 자리를 확보하고 있는 작품. 옛날 책이든 당대의 책이든 상관없이 그 작품이 우리에게 미치는 반향의 효과뿐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2. 고전이란 그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일련의 위계 속에 속하는 작품이다.

    다른 고전을 많이 읽은 사람은 고전의 계보에서 하나의 작품이 차지하는 지위를 쉽게 알아차린다.

    동시대를 잘 이해하게 해주는 다른 책들을 제쳐두고 왜 굳이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여기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이어질 수 있다. 고전을 읽기 위해서는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읽을지 설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품도, 독자도 무시간적인 구름 속에서 길을 잃고 말 것이다. 고전을 읽으면서 최대한의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동시대에 쏟아지는 글들은 적절한 분량만큼 섭취해가며 읽어야 한다.

    이상적인 상황은 한 고전작품 속에서 잘 울리는 음악을 따라가면서 현재에 관한 모든 것들은 창밖의 자동차 소음, 날씨의 변화와 같은 저 바깥의 잡음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로 행동하기 일쑤다. 사람들은 고전의 실체를 먼 메아리처럼 인식한다. 지금 발생한 일들에 관한 소식은 텔레비전 소리처럼 쩌렁쩌렁 듣고 고전은 저 바깥에서 들려오는 머나먼 메아리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정의를 덧붙여야 한다.


    13. 고전이란 현실을 다루는 모든 글을 배경 소음처럼 물러나게 만드는 글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전이 이 소음들을 다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4. 고전이란 배경 소음처럼 존속해서 남는 작품이며 이는 고전과 가장 거리가 먼 현재에 관한 글들이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제 나는 지금까지 쓴 글을 다시 써야 할 것 같다.

    고전이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이탈리아의 고전이 이탈리아인들이 자신의 문화 속 고전작품들을 다른 외국의 고전들과 비교하는 데 필수적이며 외국의 고전 또한 우리가 이탈리아 문학을 가늠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 또한 보다 명확하게 지적하고 싶다. 그러고 나서 이 글을 진정으로 다시 써야 할 것이다.

    고전은 무언가에 유용하기 때문에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고전은 읽지 않는 것보다 읽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혹여 누군가가 고전을 구태여 읽어야 하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에밀 씨오랑의 다음 글을 인용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독약이 준비되는 동안 피리로 음악 한 소절을 연습하고 있었다. “대체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오!” 누군가가 이렇게 묻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래도 죽기 전에 음악 한 소절은 배우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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