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는다는 것

    2009. 6. 25.

    by. 셰익스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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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가

      빌게이츠는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하버드 대학교가 아니라, 동네 도서관이었습니다.”고 했다. 
    에디슨을 기른 것도 도서관에서의 독서였고, 나폴레옹과 모택동을 지도자도 만든 것도 도서관을 통째로 읽을 정도의 독서력이었다고 한다. 
    시인 볼테르를 계몽사상가로 만든 저력과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사상과 인생을 만든 것도 청소년기의 방대하고 깊은 독서에서 비롯되었다. 
    세계 최초로 문자를 기획하여 만든 세종대왕도 눈병이 나도록 읽고 생각했고, 저도 존경하는 의사 안중근도 하루를 책을 읽지 많으면 입에 가시(벌레)가 생길 정도로 읽고 의지를 세웠다. 읽기는 사람을 만들고 사회를 바꾼다.  

      그런데 어떻게 읽을까? 
    어떤 책이든 마구 읽을까. 그저 읽기만 하면 저절로 좋은 결과가 만들어질까. 사람을 만들고 사회를 바꾸는 읽기는 어떤 것일까. 

      일단 손에 책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읽으며 생각해야 한다. 맛만 보는 글도 있고, 삼키는 글도 있으며, 씹어서 소화할 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 나의 삶에 에너지가 될 책은 씹어서 소화할 글들임에 틀림없다. 자신을 바꾸는 읽기라면 깊고 넓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땅속뿌리가 얼마나 깊고 넓게 뻗는가에 따라 가지와 잎이 무성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의 깊이와 넓이에 따라 내가 성장할 수 있다. 이렇게 성장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사회의 성장을 이끈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읽기는 대부분이 멈칫거림 없이 죽 읽어가는 것이다. 간혹 어려운 데가 있더라도 그냥 넘어가 버리면 그리 아쉽거나 모자란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어떻게 읽어도 읽고 나면 남는 것이 있고, 그만큼 배우고 자라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책읽기의 굉장한 매력이고 엄청난 가치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실 저자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느낄 때조차도, 독자는 자신이 진실로 다 이해했는지, 그 책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온전히 다 누렸는지를 결코 알 수 없다. 독자는 자신이 알 수 있는 만큼만 알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수평선이 세계의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수평선 뒤에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듯이, 독자에게 떠오른 의미 외에도 또 다른 의미들이 독자의 생각이 와 닿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독서가들은 단 한 권을 읽더라도 진정한 독서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라고 충고한다. 
    건성으로 하는 읽기는 겉멋을 키우지만 진정으로 하는 읽기는 자아를 키우기 때문이다. 이황 선생도 성철 스님도, 철학자 쇼펜하우어도 모두, 독서에 관한 한 진정한 정신할 것을 부탁한다. 진정으로 읽는다는 것은 글을 알고, 글을 통해 나를 알고, 그리고 나를 포함한 우리를 아는 것이다. 글이 품은 세상은, 속을 알 수 없이 깊고 끝을 알 수 없이 넓으며 그 속에 온갖 생명을 품고 있는 바다와 같다. 그 바다의 보물을 캐는 것은 내가 어디를 어떻게 탐험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 바다를 탐험하며 나 자신과 세상의 진화를 꿈꾸는 것이 진정한 읽기이다.


    2. 글에서

      읽기는 우선 필자와의 대화이다. 
    그러기에 읽기의 출발점은 필자가 하고자 한 말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마치 선물로 ‘초콜릿’을 받았는데 ‘꽃’을 받았다고 알면 틀린 것처럼 필자가 글에 담아 준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기본적인 소통이 가능하다. ‘흥부전’은 욕심쟁이 형이 벌을 받고 착한 동생이 복을 받는 이야기이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우리나라 문화재를 감상하는 중점 요소를 일러주고 관련 내용을 소개한다. 이런 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이른바 중심내용과 세부내용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잘 하려면 무엇보다 글의 특성을 정확히 알고 분석하는 것이 좋다. 
    글의 단어나 문장을 원활하게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글의 짜임새와 글의 종류, 글이 실린 매체 등을 꼼꼼히 챙기는 것이 유익하다. 
    삼단 구성의 논설문이라면 서론에서는 논제를, 본론에서는 근거를, 결론에서는 주장을 찾으면 쉽고 정확하게 읽을 가능성이 크다. 
    설명문이라면 사실적인 내용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는 ‘기미독립선언문’은 모범적인 논설문으로 이해해야 하고, 역사서에 실려 있다면 사료(史料)로서 생각해야 하며, 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학생대표의 손에 들려 낭독되고 있다면 우리나라의 독립을 주장하고 독립 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그야말로 선언문의 기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듯 글의 특징에 주목하며 이에 맞는 중심내용과 세부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요즘같이 영상이나 음향자료가 글에 곁들여지는 경우에는 이들 자료의 가치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필자가 하고 싶었던 말이 글로 적힌 중심내용이나 세부내용으로 만족스럽게 표현되지 않았을 때가 있다.
     ‘오늘 참 덥지요.’라고 말하면서 ‘창문을 좀 열면 좋겠다.’는 속마음을 가진 것처럼, 말한 그대로가 아닌 다른 뜻을 담을 때가 있다. 물론 말해진 그대로 ‘오늘이 덥다’는 것만 알더라도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된다. 
    그러나 ‘창문을 열어 달라’는 속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소통이 원활해진다. ‘흑설공주’는 마녀인 계모가 흑설공주를 도와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필자는 ‘여성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주인으로 생각하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 
    비단 허구물만이 아니라 실용서로 분류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도 단순히 문화유산에 대한 지식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애정을 갖게 하려는 설득의 의도가 있었을 수 있고, 유명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강력한 군주의 통치 기술을 설명하고 있지만, 이탈리아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음을 읽을 필요가 있다. 글은 문자로 적힌 뜻만이 아니라 그 속에 필자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어 했던 속뜻을 알아야 한다.

      한편, 글이 가진 속뜻은 필자만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필자가 애초에 별다른 의도를 갖지 않고 글을 썼다 해도 독자는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선 후기 사회를 잘 아는 사람이 흥부전을 읽고서, ‘흥부전에서 착한 동생 흥부는 몰락한 양반을 상징하고 욕심쟁이 형인 놀부는 재산을 모아 양반 신분을 산 상놈을 상징하는 것 같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면 이야기의 주제는 ‘착한 사람이 복은 받는다.’그보다 ‘양반이 재산을 갖게 하여 조선 사회를 안정시켜야 한다.’로 생각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필자가 의도한 뜻과 다른 뜻을 생각할 수도 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춘추전국시대의 정치적인 혼란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뜻을 담은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을 어떤 이는 이기심을 버리고 욕심없이 살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또 어떤 이는 현대의 물질문명에서 벗어나 자연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이 좋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글의 의미는 독자의 해석에 따라 창출되기도 하는 것이다. 실제로, 글에서 필자가 전하고자 한 바라는 것이 매우 불분명하기 때문에, 모든 뜻은 독자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읽기는 ‘필자와의 대화’를 넘어 ‘독자가 의미를 구성하는 과정’이라 말해진다.
      그러나 속뜻은 아무렇게나 지어내진 뜻이 아니다. 그럴듯한 근거를 갖고 추리한 것이어야 한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술래처럼 친구의 발자국 소리, 달려갈 수 있는 거리, 숨을 만한 틈새 등을 살펴 숨어 있는 친구를 찾아내듯이, 여러 가지 합당한 조건을 따져보고 뜻을 생각해야 한다. ‘오늘 참 덥지요.’라고 했는데 이미 창문이 열려 있거나 지금 말한 곳이 에어컨 덕분에 바깥보다 더 시원하다면 ‘창문 좀 열어 주세요.’로 이해할 까닭이 없다. 실내는 후덥지근한데 창문이 꽉꽉 닫혀있기 때문에, 그리고 창문을 열어달라고 직접 말하기 어려운 조건이기 때문에, 속뜻이 따로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분명하지 않은 속뜻을 알아내고 발견하기 위해서는 글을 둘러싸고 있는 조건들 즉 맥락을 살펴야 있다. 
    글이 어떤 사회적 상황에서 만들어졌고 필자가 어떤 사람이었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컨대, <흥부전>은 신분제가 혼란한 조선 후기에 만들어졌으며,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사회주의의 장점을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던 분위기에서 출판되었으며, <목민심서>를 쓴 정약용은 훌륭한 암행어사이기도 했었다는 것을 알아야,  이 글들의 속뜻과 가치를 더욱 제대로 알 수 있다. 

    글을 둘러싸고 있는 맥락에 대한 지식을 갖추도록 하고, 맥락과 글을 의미 있게 관련지으며 읽도록 하자. 사실, 맥락은 속뜻을 발견하는 데만이 아니라 중심내용을 알고 세부내용을 자세히 이해하는 데에도 필요하며, 뒤에 말할 글 내용을 평가하는 데에도 필요하다. 배경 없는 그림이 없듯이 맥락과 동떨어진 글이란 존재할 수 없기에, 읽기의 모든 과정에서 맥락은 항상 살피고 챙겨야할 항목이다.

      한편 글을 읽으면 중심내용이나 세부내용, 또는 속뜻과 같이 글에서 드러내고자 한 의미는 아니지만, 은연중에 독자가 감지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또 다른 유형의 의미들이 있다. 
    예를 들어, 공주를 주인공으로 하는 전래동화들이 ‘여자다움’이 무엇인가를 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지만, 이런 전래 동화가 만들어진 시대의 여성에 대한 관념은 고스란히 글 속에 담겨 있어서 독자는 공주 이야기를 통해서 고전적인 ‘여자다움’에 대해 은연중에 배우게 된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그네 뛰는 춘향을 보고 방자에게 시켜 춘향을 오라고 전하자, 춘향이 대답한 ‘나비가 꽃을 찾지 어찌 꽃이 나비를 찾는단 말이냐. 네 상전에게 그렇게 전하여라.’고 한다. 
    이 대목은 춘향의 자존심과 가벼운 거절, 이몽룡의 적극성 요구 등의 뜻으로 이해되지만, 더욱 민감한 독자라면 당대 사회의 연애 풍속과 여성관, 신분제 등, 이 말에 전제되고 내포되어 있는 잠재된 뜻에 대해서도 감지할 수 있다. 
    뉴튼의 ‘프린키피아’를 읽으면 우주공간이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휘지도 않는 고정적인 절대공간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아인슈타인의 우주와는 아주 다른 모습니다. 
    이렇게 필자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당연하게 느껴지는 가치관이 글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고, 의식 있는 독자라면 이런 뜻에 더욱 민감하려 애쓴다. 드러내 전하려는 뜻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바탕에 깔려있는 잠재된 의미도 감지할 수 있어야 수준급의 독자요 비평가가 될 있다.


    3. 내게로 

      읽기는 글에서 출발하여 나에게로 오는 작업이다. 
    드러난 뜻이든 속뜻이든 잠재된 뜻이든, 글에서 캐낸 것은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어야 가치가 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내 것으로 소화되지 않으면 나의 몸이 되지 못하듯이, 글을 읽어 갖게 된 어떤 앎이나 생각이라도 나의 삶 속에 스며들지 못하면 창고에 쌓아둔 지식더미에 불과하다. 비록 오늘 읽은 책이 내일 당장 에너지로 되어 나오지 않더라도 오랜 시간을 두고 부화하고 숙성되어 삶에 스며날 수 있어야 한다.   

      내 것이 되는 첫 번째 관문은 평가이다. 
    필자가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논리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는지, 불완전한 설명이나 분석이 있는지 등을 살피는 것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을 쓰면서 훗날 발전한 유전학에 대해 모르고 있었으므로 아쉬움이 남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암컷의 유전자가 동물의 생식에서 하는 역할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잘못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고, 
    유클리드의 <기하학 입문>은 평행선의 관계에 대해 충분한 가정을 세우지 못해 불완전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 탁월한 독자가 될 것이다. 
      평가는 흡수할 것과 다시 생각해야 할 것, 또는 버려야 할 것을 가려준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지를 평가로써 결정한다. 글을 읽고 배우고 익히는 것도, 실은 긍정적인 평가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글을 읽을 때면 언제나 이런 평가 작업을 하는데, 다만, 필자가 가진 지식이나 권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을 긍정하면서 받아들인다. 의식적이고 날카로운 평가는 어렵고 힘든 과정이지만, 적극적인 평가가 있음으로써 글이 내 삶에 더 강렬하게 다가오고, 또한 개선하고 더 탐구해야할 미래도 발견할 수 있다.
      평가의 관문을 지나, 읽은 것은 내 삶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 
    실학자인 박제가는 청나라의 문물에 대한 책을 읽었지만 조선의 상황에 적합한 이론으로 활용하였다. 독서가이기도 했던 나폴레옹은 잘 정리된 서랍같이 읽은 내용을 정리해 두고 전투를 치르면서 적시적소에 꺼내 사용하였으며, 루소의 계몽주의 서적을 읽고 프랑스 국민에게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한다. 이렇게 읽은 것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는가. 
    <책 먹는 여우>의 ‘여우’와 같이 읽은 책을 다시 책으로 써내는 일도 좋거니와 
    <해리포터>의 ‘헤르미온느’같이 박학한 지식을 그때그때 꺼내어 위기 극복의 돌파구를 만들어내 줄 수 있다면 그야말로 보람 있지 않겠는가. 
    더구나 <제삼의 물결>을 읽고 문명의 진보를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을 얻고,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을 읽고 내 삶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독서가 될 것이다. 읽은 것은 유용하게 사용됨으로써 활력을 얻는다. 
      또한 읽은 것은 정서적인 변화를 불러오는 감동이나 깨달음 등으로 내 것이 되기도 한다. 감동과 깨달음은 읽고 이해한 것에 대해 정서적인 교감을 느끼는 것이다. 

    절정의 시기에 귀가 멀어 절망에 빠져 있던 베토벤도 <플루타크 영웅전>의 한 대목, ‘사람은 무엇이든 좋은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에는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를 읽을 때, ‘고통 속에서 환희가 피어오르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좌절감에서 벗어나 여러 대작들을 작곡할 수 있었다고 한다. 
    12년간 토크쇼 시청률 1위를 기록한 미국 AM시카고의 토크쇼 담당자 오프라 윈프리는 기구한 성장기를 보냈다. 그러던 중 <부르클린의 나무(A Tree in Brooklyn)>라는 책을 읽고 자신의 인생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말하기를 ‘이 책의 주인공 프랑시 노랑은 역경 속에서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독서에 몰입하는데, 그 노랑은 바로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스토리에 빨려 들어갔고, 말 그대로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윈프리가 독서로 얻은 것은 공감과 위안의 감동이었고 이로써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할 줄 아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감동과 깨달음은 읽기가 독자의 삶에 에너지가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읽기 요소이다.  


    4. 우리에게로 

      안중근 의사를 두고 애국자라고도 하고 (감히) 테러리스트라고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민족 침략의 원흉을 쏜 애국자임에 틀림없는데, 일본에서는 근대화의 영웅을 죽인 사람이라고 기록한다. 
    같은 사건을 두고 생각이 서로 다르다. 서로가 처한 상황과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모든 분쟁, 역사 속의 크고 작은 모든 사건들이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것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달을 보며 어떤 때는 암스트롱을 생각하고 어떤 때는 계수나무를 찾고 어떤 때는 아무런 생각이 없을 수 있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대상을 보는 렌즈가 다르기 때문이다. 

      비단 사건만이 아니라, 글 또한 그러하다. 
    같은 글을 두고서도 사람마다 그 뜻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심지어 같은 사람이라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가 있다.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를 읽고 저마다 다른 경험을 떠올리고, 
    <탈무드>를 읽고 유태인은 전통에 대한 애정을 느끼지만 기독교인은 종교적 차이를 느끼고 유교 관습을 가진 동양인은 개인주의를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고 남성은 엉뚱함을 느끼지만 여성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어릴 때 재미있던 이야기가 지금은 시시해지고, 과제를 하기 위해 읽던 어제는 지루했지만 여유 있게 읽는 오늘은 새롭고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글을 읽을 때에는 읽는 사람의 상황이나 입장은 물론이고, 그 사람이 가진 자아와 세계관, 대상을 보는 태도나 관점 등에 따라 평가나 감상뿐만 아니라 잠재된 뜻과 숨은 뜻이 달라 보이고, 심지어 중심내용까지도 달라 보이기도 한다. 

      다행히 우리는 같은 시대 같은 사회에서 비슷한 상식과 문화를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글의 의미가 그렇게 판이하게 달라 보이는 경우가 많지 않다. 설혹 달라 보이는 것이라 해도 조금만 설명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노라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더라도 글이 가진 뜻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매우 미세할지라도 독자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이며,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아량이야말로 현대사회의 덕목이다. 나의 읽기에서 깊이를 만드는 데에서 나아가, 다른 이와 함께하며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차이를 주장함으로써, 읽기는 개인의 일이 아니라 사회의 일이 된다. 그래서 읽기를 ‘사회적 행위’라고도 한다. 이렇게 읽기는 나에게서 나아가 우리에게로 오는 작업인 것이다.

      읽기에서 서로간의 다름을 경험하고 다양한 이해의 폭을 경험하려면 독자들이 서로 읽은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다. 독서 토론으로 같음과 다름을 끊임없이 비교해 보고 따져보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무엇을 설득시키고 무엇을 더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서평이나 감상문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진정으로 우리 모두에게 소통되는 의미가 무엇이고, 저마다 만들고 소화해야할 의미가 무엇인가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읽기는 드러낸 뜻, 숨은 뜻, 잠재되어 깔린 뜻 등을 알고, 평가하고 활용하거나 감동과 깨달음 등을 만들어 내며 나의 자아를 형성하는 일이다. 
    또한 필자의 뜻을 알고 다른 독자와 같음과 다름을 알면서 사회화되기도 하고 사회를 바꾸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읽기는 개인과 사회를 진화시키는 무한한 에너지를 가진 가능성의 세계이다. 
    그러기에 쓸모없는 독서는 없겠지만, 가능하면 스치고 지나가는 읽기보다는 쌓고 담을 수 있는 읽기를 하도록 하고, 또 쌓고 담기만 하기보다는 느끼고 생각하고 깨닫는 읽기를 해야 하며, 나아가 다른 이와 발전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읽기를 하는 것이 좋다. 

    글에서 만끽할 수 있는 깊이와 넓이를 흠뻑 느끼면서 생명력을 갖고 진화할 수 있는 ‘살아있는 읽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읽기는 미지의 바다를 탐험하는 것과 같이 흥미진진한 일이다. 읽기는 결코 노력을 배반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만큼 빛을 발하는 것이 읽기이다.



    김봉순(공주교육대학교) [한국독서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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