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국가적인 법원의 위안부 배상 결정 논란과 법과 도덕의 문제

    2021. 3. 24.

    by. 셰익스컴퍼니

    반응형

     

    역사학과 입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읽히는 책으로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있다. 희망에 부풀어 읽어보지만, 아는 부분은 원론적이고 알고 싶은 부분은 난해해서 실망한다. 책을 덮고나서, 대게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문장만 기억하고 만다. 책의 진가는 졸업할 즈음, 한 명의 역사학자에게 수여하는 계급장처럼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역사는 역사가의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는 저자의 당부와 함께.

    법과대학 입학생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다. 기초 교양과목 시간에 배우는 ’법과 도덕’이라는 과목이 그렇다. 대부분의 법대 신입생들은 이 과목의 진가를 알기엔 아직 어리다. 고등학교 국민윤리같은 당연한 말씀으로 알아듣기 때문이다. 마치 일반인들이 ‘법과 도덕’이라 하면 법은 매우 도덕적이어야 하고 도덕적 양심을 법이 배신해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착각하기 십상인 것처럼 말이다.

    법대를 졸업하고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굳이 법대 첫 과목으로 ‘법과 도덕’이 편성된 참뜻을 알게 된다. 법과 도덕을 유사한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일종의 법언이 들어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나아가 법과 도덕은 목표가 다른 것이라는 것을, 대학이 학생들의 백지같은 마음속에 새겼음을 깨닫는다. 이것이 소위 ‘리걸마인드’의 출발이다. 법과 도덕이 그렇고 그런 유사한 것이어서 구별의 실익이 없다면 굳이 ‘법과 도덕’이라는 테마로 한 학기를 배정하지 않았을 터다.

     

    법과 도덕이 다르다 했으니 법감정 또한 법과 다르다.

    소위 법감정이라고 이야기되는 것은 도덕에 입각해 법을 판단하는 경우를 말한다. 법감정대로 하지말라는 것이 법이다. 감정은, 도덕은 주관적 인간이 판단의 주체이고 그에 따른 결론이다. 반면 법은 판단의 주체가 법이고 법에 따른 결론을 의미한다.

     

    인간이 판단하는 것을 인치라 하고 법에 따라 판단하는 것을 법치라 한다. 인치는 힘을 가진 자들이 하는 것이기에 그에서 벗어나 법치로 감으로 인해 비로소 권력자의 일방적 속박에서 피할 수 있었다. 한 사회가 전문성을 가진 제3자에게 법에 따른 판단의 권한을 부여함으로서 자력구제를 금지하고 법적판결을 따르게 한 것은 근대가 가져온 또 하나의 진보였다.

     

    물론 법도 사회에 따라 변화하지만 법은 일종의 공식과도 같아서 법률의 적용은 객관적인 것을 지향한다. 동일한 케이스를 같은 법이 적용되는 법률가들이 판단한다면 오차범위 이내의 결론이 나오는 것은 같은 조건하에 과학실험이 이루어지면 오차범위 내의 결과가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여야 한다. 법적 안정성은 사회의 안정성을 담보한다.

    법은 형평성을 기본으로 한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아니다.

    법감정은 피해자 중심주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언은 최초의 법전인 함무라비법전에 나오는 말로 법이 어디서 시작되었는가를 담고 있다. 이를 보복적 표현으로 알고있는 것은 완전한 오해다. 이 법언은 법감정을 벗어난 법의 이념을 설명하고 있다. 즉 과잉보복금지와 당사자간의 형평성을 표창한 말이다. 그래서 법대로만 하면 피해자는 대부분 억울한 감정이 들게 되어있다.

     

    그런 점에서 법은 공존의 원리다.

    가해자도 죄값을 치르면 다시 사회에서 받아들인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법감정이나 도덕은 가해자가 다시는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심리를 갖고 있다. 어떻게 사람을 죽이고 강간한 사람과 세월이 얼마간 흘렀다하여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있단 말인가?

     

    이렇듯 법은 냉정한 것이다. 피해자도 보호해야지만 가해자도 보호하고 싶어한다. 원고의 주장도 들어줘야하지만 피고의 항변도 같은 값으로 들어줘야 한다. 법을 적용할 요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아무리 어떤 자를 처단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도 "난 판단할 입장이나 주제가 아닐세"라고 빠져야 한다.

     

    이를 위해 당사자적격 및 관할권, 기피회피제도 등을 통해 판결의 결과에 대해 사후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요건을 엄격하게 하고 있다. 법적요건을 따지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사법은 요건이 갖춰진 상태에서 판단하는 것이고 요건이 갖춰지지 않았다면 판단을 자제해야 한다. 법정에서의 주장이나 항변도 요건에 맞아야 인정될 수 있다. 그래서 변호사제도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트레이닝이 안되어 있는 사람들이 판결에 가타부타한다는 것은 마치 원소기호를 모르는 사람들이 화학논문을 보고 타박하는 것이나 미식축구 룰을 모르면서 왜 저기에서 킥을 하느냐고 따지는 것만큼이나 처참할 수 있다. 또 법관은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헌법 103조에 명시되어 있다.

     

    여기서 일반인은 양심을 앞서의 도덕과 유사한 개념일까?

    아니다. 여기서 양심은 법적양심이다. 법률전문가로서 법의 취지에 맞게 다른 고려없이, 설사 그것이 나의 도덕심과 다르다 할지라도, 법률대로 냉정하게 적용하는 것이 헌법에 명시된 ‘법과 양심’에 따른 판결이다. 시쳇말로 법률가에게 "너는 애미애비도 없냐? 양심도 없냐?"라고 지적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 법관은 인간적 양심이 없다. 오직 법률적 양심만 있다. 그게 법률전문가의 직업윤리다. 그러한 법치가 우리사회엔 필요하다. 권력자와 마찬가지로 판관이 개인적 양심으로 판결한다면 그것도 법치가 아니라 판사에 의한 인치다.

     

    이를 가장 전면에서 경계해야 하는 것이 사법부다.

    그러라고 오랜 시간 공부하여 자격을 득한 자들을 트레이닝시켜 우월적 지위를 사회에서 부여한 것이다. 이들은 비행기 조종사처럼 일반인과 다른 전문가이다. 착륙여부를 승객과 상의해 다수결로 정할 수 없듯이 말이다.

     

    최근 사법부가 법률가로서의 전문성을 벗어난 정치적 판결이 종종 화제다.

    또 객관적 증거나 사실이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각 심급마다 전혀 다른 판결이 나와 스스로 사법신뢰를 무너뜨리는 일이 잦다. 그러니 왠만하면 3심 대법원까지 가려하고 대법원은 업무량 폭주로 몸살을 앓는다. 대법원에 상고되는 사건의 수는 2017~18년 사이의 1년 기준 미국이 6,315건, 영국이 228건, 일본이 민사 2,104, 형사 1,995건인데 반해 한국은 47,979건이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011718

     

    폭증한 상고 사건…대법원 아닌 ‘최종심’ 생길까

    실제 파기환송율은 그리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에 비해 이처럼 현저히 상고건수가 많은 것은 판결이 판사마다 다르게 나올 수 있다는 일종의 불신이 만연해있다는 반증이다. 사법부는 예측가능한 법대로의 판결에 더욱 신중해야 할 때이다.

     

    사법이 최후의 보루인 것은 사법이 결정하면 이행되기 때문이다.

    이행될 수 없는 판결은 판결이 아니다. 이행될 수 없는 줄 알면서도 판결을 내리는 것은 자신의 법감정에, 도덕심에, 호승심에 못이겨 법률전문가임을 부정하는 행위로 자격을 스스로 버린 것이니 판결을 하지 말라. 도덕률을 세우고 싶으면 철학자가 되고 영역을 넘는 일을 하고 싶으면 정치가가 되라.

     

    삼권분립도 영역을 넘지않는 자제에서 나온다.

    서로 영역을 넘어 다툼이 생기면 분립은 불가능해 질 것이다. 관할권도 관할을 넘지않는 자제에서 나온다. 관할을 넘어 다툼이 생기면 공존은 불가능해 질 것이다. 축구로 치면 사법은 공격수가 아니고 수비수다. 수비수가 골욕심을 자제하는 것은 한 골을 넣겠다고 자리를 비우면 세 골, 네 골을 먹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입법권의 남용도 자제해야한다.

    사건만 터지면 과잉입법으로 법을 누더기로 만들어 자가당착의 우를 범한다. 개인적으로는 안타깝지만 피해당사자의 주장을 입법과정에 직접 반영하는 것은 문제가 될 소지가 크다. 극단우위의 법칙이 작용하기때문이다. 마치 심사에서 최고, 최저점수는 빼고 평균을 내듯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법이라는 이름만 붙여 인치를 감추는 수단으로 악용하지 말라. 형평성을 잃은 법은 사회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것이다.

     

    ‘법과 도덕’ 강의는 법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을 알려주고 있다. 뜨거운 도덕과 차가운 법의 구분을 알려주었던 법대 신입생 강의실의 수업을 다시 되짚어 보았으면 한다.

     

    728x90

    댓글